엄마와 옥수수
(행복한 가정//가족사랑수기)
옥수수를 먹으려니 눈물이 납니다.
여름이면 흔히 먹는 옥수수인데 먹을때마다 눈물이 나는 것은 엄마 때문입니다.
옥수수를 보면 아쉬움과 그리움이 마구 뒤엉켜 가슴을 방망이질합니다.
엄마는 찐옥수수를 고무 대야에 담아 관광 유원지를 다니며 파는 '옥수수 아줌마'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종종 엄마를 따라다니며 옥수수를 파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엄마를 보며 나도 뭔가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내 초라한 엄마의 모습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괜히 투덜거리고 했습니다.
"엄마! 다른 엄마들처럼 예쁜 옷 좀 입으면 안돼?"
"뭐가 어때서 그러니. 멀쩡한데..."
다른 아줌마들은 그나마 깔끔한 차림으로 장사를 다니는데 엄마는
허드렛바지가 구멍이 나면 천을 대어 손바느질을 해서 입고 다녔습니다.
신발은 우리 남매가 신다 버린 입 벌어진 운동화에, 밥값이 아까워
유원지에서 남은 음식으로 대충 점심과 저녁을 때우셨고,
버리는 밥이 아깝다며 집으로 가져와 아침으로 드시기도 했습니다.
옥수수 판 돈으로 절대 식사를 사 드시는 법이 없고, 아주 늦은 밤까지 옥수수를 팔다
한두 개가 남으면 그것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셨습니다. 너무 늦어 버스가 끊기는 날이면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동네 어귀에 내려 집까지 한참을 걸어 들어오셨지요.
돌아오는 그 발걸음이 얼마나 무겁고, 몸은 또 얼마나 천근만근이었을지...
엄마가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었지만 막내인 저는 엄마가 고생하시는 건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 돈의 가치를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못한 채 용돈을 받으면
'어디다 쓸까? 무엇을 사 먹을까?' 궁리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엄마는 고달픈 길을 가면서도 저희 2남 4녀 모두 대학에 보내기를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일 년동안
학교에 다니지 못한 언니, 사춘기로 인해 엄마의 속을 시커멓게 만들었던 오빠.
다들 대학 가는 것보다는 취업을 해서 하루라도 빨리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억척스러운 엄마 덕분에 고등학교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이 한 명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지 아이를 키워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살기 좋아졌다 해도 아이 키우는 일만큼은 여전히 몸과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어려웠던 시절 여의치 않은 형편에 엄마는 여섯 남매를 어찌
감당했을까요. 엄마가 왜 허드렛바지의 구멍을 기워 입어야만 했는지, 왜 우리가 신던
운동화를 신으셨는지, 몸에서는 왜 늘 땀냄새가 났는지 이제야 깨닫습니다.
자녀를 위해 자신을 버렸기에 당신이 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몇 년 전,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조금만 더 빨리 엄마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효도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하고 또 후회해봐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옥수수만 보면 오롯이 생각나는 엄마. 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엄마의 희생, 엄마의 끝없는 사랑을 너무 늦게 알아 죄송해요.
엄마!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